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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진안가막리들 전주 - (김재) 홍문광승천(정여립)

by trekkingtales 2025.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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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가막리들 전주

(김재) 홍문광승천(정여립) 전북 김재시 금산면 청도산 3 정여립 [정여립, 명종 1년(1546)선조 22년(1589), 44세] 관면 월암리에 정여립 생가적이 있다고 한다) 출신, 고조는 수의부의 정준, 양조는 진사정극량, 할아버지는 도강김씨(추정,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 봉서동촌, 아들이 정옥남(정옥남)·정서(정석)1)다. 영렬기술 14권 조상 조고사본언에 정여립은 “금구(현재 모악산 금산사 아래)에서 장가들이 거기서 살며 과거에 급제했다. ····················· 1) 먼저 김씨, 아들이 정옥남(정옥남) 정서(정서) : 출처 정여립의 평생과 사상 p74

 

【정 여립】 이 표지는 금산면 청도리 6, 월명암 입구 표석 앞에 세워져 있다.

 

15세 때 익산군 수의 아버지를 대신해 일을 처리할 때 아이들이 군수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자라면서 체격도 늠름한 장부가 되어, 통력력이 있어, 뇌가 아카시해 역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했다. 영려실 기술에는 여립이 기백이 굉장하고 팔이 좋고 입을 열기만 하면 꼭 좌석이 칭찬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기백과 언제의 탁월성을 보이고 있다. 이준과 성혼의 문인으로 명종 22년(1567) 진사, 조상 2년(1570) 24세에 식년문과 을과를 차석에서 급제한 뒤 이준과 성혼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성균관학유, 조상 16년(1583) 예조인 그는 소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 측에 서서 이이가 죽은 뒤 이이를 비롯해 박승(朴淳)·성혼을 비판하고 조상이 이를 불쾌하게 생각해 정여립을 ‘형서 ‘형태, 손나라의 학자 정’. 이후 실권한 동인의 추천에서도 관직을 얻을 수 없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가 동인 측에 서는 사정은 확실하지 않지만, 이조 전란의 소망에 오를 때 이정이 반대한 탓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오히려 직정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리발(李潑)과 잘 어울리는 탓이 아닌가 한다. 침착한 그는 동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고, 감사와 수령이 싸워 그의 집을 찾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진안각 전면의 수리내 마쓰무라 다케시마에 서실을 세워 대동계를 조직해 매월 사회를 여는 등 세력을 확대했다. 조상 20년(1587) 4월, 왜구가 왜선 18척을 운전해, 녹도(가시마)와 손죽도에 침범해, 녹도 권관의 이대원이 전사했다. 조정에서는 신립을 방어사로 변협과 김명원을 순찰사로 방어에 나섰지만 모두 패했다. 이에 전주부 윤 난히코가 낙향했던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대동계원을 동원, 손죽도에 정박했던 왜구를 기습공격 전멸시켰다. 대동계원의 전투력이 상당했던 것 같다.

 

그 후 대동계 조직은 황해도 안락의 회복, 박연령, 해주의 지금두, 운봉의 승려의연 등 기인·모사의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조상 22년(1589) 10월 황해도 관찰사 한준(한준), 안락군 수의 이축(이축), 재룡군 수 박정강(박충려), 신천군 수 한영인(한간인) 등 연명으로 고변이 있었다. 정여립 등 대동계원들이 한강의 결빙을 이용해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입경해 대장신립과 병조판서 권정 추정을 살해해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에 정여립은 쇠장식 별장을 떠나 아들의 옥남과 함께 다케시마(진안읍 카마크리산 6)로 피난해 관군의 포위가 좁아지자 자살했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정희신은 정택의 모함에 유배되며,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 처리하면서 이발(2개) 2를 비롯해 1,000여명의 동인사가 ····················· 2) 이발(李潑)·이길(李洁)묘 :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산 70(노두:3)

 

그리고 맹인이 성지화자라고 칭찬한 야나기시타의 말을 인용한 가위군이라는 말은 바로 혁명적인 발언이 아니다. 신코히로가 빨리 지적한 것처럼, 그는 400년 전에 군신강상론을 타파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가 혁명성을 가진 사상가인 것은 분명하다. 둘째, 그는 전부터 있던 목자는 멸망하고 정읍은 흥한다는 참언을 이용해 정읍은 자신을 가리킨다는 낭설을 퍼뜨려 그것을 믿게 했다고 한다. 왕조의 운수가 다해 천명이 타성에 내려 새로운 왕조의 출현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도참 신앙이며, 이를 고의로 조작했다는 것은 바로 반역·모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그의 집에서 압수된 제천문에는 선조의 실덕을 열거해 조선왕조의 운수가 다한 것을 논하고 천명의 시급한 이행을 기원한 흉포한 불평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조상 아래에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을 비밀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전북완주군 상관면 신리 3번지의 정여립 상가터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김제군 금산면 상용리 395, 쌍용사에는 주지승려가 꿈에서 본 정여립과 비슷한 부처를 탑 위에 올려놓고 있다. 무덤은 전북 금제시 금산면 청도리 6 히가시야무라 회관 앞의 석굴 형태로 되어 있다고 한다. 현지에 가 보니, 마을 회관 앞에는 가옥이 있어, 석굴을 찾을 수 없고, 회관의 뒤로 돌아가면 밭에 석가마가 있었지만, 정정립의 무덤으로 단정할 수 없었다.

 

[정여립선생님의 처가가 안동김씨라고 생각하는 이유] 지난 안동김씨 문온곤파 참의공계 동곡종중(장파) 사과공(휘윤강) 이하 선대묘소 합동리장 고유제가 전북 김재시 금산면 청도리 370영사재에 있었다. 이어 안동김씨 집성촌인 히가시타니무라에 와 김평저수지 위에 있는 정 여립선생님의 집과 히가시타니무라 회관 앞에 있다고 전해지는 정재립의 석굴묘도 대답했지만 실제 석굴은 마을회관 뒤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정여립 선생님 집을 찾는 입구와 월명암 입구는 같고 월명암 입구 표석 앞에는 정여립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 기록에서 처족이 김극임과 그 동생이 김극녕이라면 도강금씨가 아니라 안동금씨여야 하는 것이다. 그 가계가 무주현 감금동(金椿)모당 홍리상과 양천운의 장인내 자주주부 금고언증승지 김금寬, 金克孝, 金克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도 처족 김극임과 그 동생이 김극녕에 대한 본관은 언급하지 않고 다른 처족금 대립이 도강금씨이기 때문에 “정여립의 처가는 향촌사회의 명망가인 도강금씨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즉, 도에 김씨로 단정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기록 조선왕조실록 중 조상실록을 살펴보자.

 

위 기록은 조상실록에 정여립 기축가와 관련한 김극인·김극인 형제가 국문을 받는 내용이다. 김국광과 김국인은 내 자주주부 김고안 조상의 장남과 3남이다. 앞서 기록 속에서 김국광과 김국영에서 김국영은 4남이다. 이처럼 김고안 조상의 아들 3형제가 정여립의 기축사와 관련해 국문을 받고, 한편 북도로 유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국광과 김덕인 형제는 정여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정철의 사주로 길삼봉이 최영경과 무고하고 후일 이 사실이 밝혀져 북도로 유배를 한 것이다. 당시 역적은 삼족을 멸망시키는 시대였지만 기축가게로 1,000여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처족이었던 김국관, 김국인, 김광영 형제는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에서 다른 기록을 검색했다.

 

(19세) 정경: 대사헌 (20세) 정세미(정세미): 부사 (21세③) 정수(정겨) 즉 정희신과 정여립은 삼당 숙질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 계보에서 볼 수 있듯이 정언신의 제3의 스승이 포천의 철원 부사공의 김패로 이미 동레종씨와 안동김씨 사이에 혼맥이 이어지고 있어 추후이지만 정언신의 증손자 정겨의 숭배가 목소리진 김패는 김극관·금극인·김극녕과 14마을 사이이며, 김확과 금계는 6마을 사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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